논단

난 화분

안국환 2013. 10. 10. 21:35

난(蘭) 화분


아침에 일어나면 난향(蘭香)이 거실에 가득하다. 요 며칠 동안 나는 난향에 취하여 매우 행복하다. 한 포기의 꽃에서 피어나는 향기가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려 보기도 하지만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다. 어떨 때는 잠자리에서 콧속으로 파고드는 난향 때문에 잠을 깨기도 한다.


우리 집 베란다에는 크고 작은 화분이 30여 개 있는데 그중 난 화분이 13개 있다. 그렇다고 내가 난 가꾸기에 특별한 취미를 가졌다거나 난을 유별나게 사랑해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난 화분이 이렇게 늘어났다. 벌써 10여 년이 지난 세월이지만 퇴직할 때 여기저기에서 보내어 온 화분들을 버릴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온 것들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베란다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난 가꾸기에 온갖 정성을 쏟는 친구가 일 년에 한 번씩은 꼭 분갈이를 해주어야 하는데 분갈이는 이렇게 이렇게 하며, 물은 4~5일만에 한 번씩, 난분의 관리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지만, 지금까지 분갈이를 한 번도 제대로 해 준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물도 마음 내키는 대로 주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한 포기도 죽지 않은 것은 물론 신기하게도 해마다 3월에서 5월만 되면 우아하게 꽃을 피워 낸다.

 

3년 전 집 딸 아이 혼사 때에는 난 화분 세 개가 한꺼번에 꽃을 피워 온 집안을 난향으로 가득 채워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난이 꽃을 피울 때마다 나는 집사람과 꽃이 핀 난 화분을 받침대를 정갈하게 씻어 그 위에 올려 거실 가장 중심부에 놓고 신기하게 생각하며 들여다보곤 했다.

 

우리 집 난 화분은 평시에는 베란다에서 추운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이나 한결같이 푸대접을 받으며 생명을 이어 가지만, 일단 꽃만 한 송이라도 피우기만 하면 화사한 받침대에 장소도 그 살벌한 베란다를 떠나 거실의 가장 아늑한 중심부로 옮겨져 온 집안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그야말로 칙사 대접을 받는 신세로 신분이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길어야 보름 정도나 될까? 꽃이 시들기 시작하여 풍기는 꽃향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원대 복귀도 시간문제다. “꽃도 늙으니 향기가 약해지네.” 난분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중얼거리며 서글피 웃는다. 난 분 하나에도 인생의 양지와 음지가 있다.


그러나 난 화분도 매양 즐거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의 여행 일정이라도 잡히면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이 화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느냐 이것이 문제였다. 집안에 있는 대야나 물그릇을 총 동원하여 물을 채우고 화분을 담는다. 여행 기간이 열흘이나 보름쯤으로 늘어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그럴 때마다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의 글귀가 생각나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 난 화분이 새로 생겨 식구가 늘어나게 되었다. 지난 7월에 있었던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 창단 20주년 기념음악회를 하면서 받은 난 화분 때문이다. 몇 년 전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을 졸업한 악장 성은이가 장래를 결정하는 시험 때문에 특별 이벤트로 마련한 졸업생 연주 무대에 참가가 어렵다면서 집으로 배달한 화분이다.

 

그 화분이 지금 온 집안을 난향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꽃대가 세 개나 되고 꽃대 한 개마다 5〜6개의 꽃이 피었으니 그 향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나는 그 향을 맡을 때마다 성은이를, 관현악단의 단원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염원한다. ‘아침마다 피어나는 난향처럼 너희들도 자라나서 이 사회에 향기를 가득 뿌리는 사람이 되어라.’

 

<시니어리포터 안국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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