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시 송광면 봉산리의 산척마을. 조계산 자락에 푸근하게 자리잡은 이 마을에는
다랑논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산자락 비탈진 사면에 층층이 석축을 쌓아 만든 다랑논에
익어가는 벼가 물결칩니다. 땅 한배미만 있어도 물길을 대고 써레질을 해서
대대로 농사를 지어온 산골 마을의 농부들에게 가을은, 그것만으로도 축복이지요.
젊은이들은 다 도시로 나가고 남은 노인들이 아픈 허리를 두드려가며 쉬엄쉬엄 짓는 농사이니
소출이라야 제 먹을 것도 빠듯한 정도지만, 그래도 논둑에 서서 누렇게 익어가는
논을 바라보는 노인들의 표정은 환합니다.
척마을에는 폭이 고작 두 세 뼘이나 될까 싶은 작은 논부터 농기계를 넣을 수 있을 정도의
제법 너른 논까지 산자락을 타고 층층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저 산자락 능선의 굴곡과 땅의 기울기에 따라 다지고 터를 골랐을 뿐일 텐데 층층이 펼쳐진 다랑논이
그려내는 곡선은 미술작품처럼 조형적입니다.
사실 이런 가을 풍경이 어디 산척마을뿐이겠습니까.
우리 농촌 어디서나 가을 들녘의 풍경은 이와 다르지 않지요.
이삭이 익기 시작한 논은 노란 형광빛으로 물들어가고, 마을 뒷산에는 탐스러운 굵은 밤들이
밤송이 안에서 곧 터질 듯 부풀었고, 흙담 안쪽의 감나무에 매달린 감은 뾰족한 끝부터
노랗고 빨갛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대추나무에 휘어질 듯 달린 대추들도 하루하루 가을바람에 맛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흔히들 ‘남도 답사 1번지’로 전남 강진을 꼽습니다만, ‘남도 여행의 1번지’ 자리는 전남 순천의 것이지 싶습니다.
어느 계절이나 그렇긴 하지만 특히 가을날의 순천에는 어찌나 가볼 곳이 많던지 갈림길마다 망설여진답니다.
가을걷이를 앞둔 다랑논이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는 조계산 자락의 산골마을들.
가을볕이 초가지붕 위로 반짝이는 낙안읍성의 오래된 정취.
하루하루 붉은 기운이 더해가는 칠면초와 이제 막 꽃을 피운 갈대가 무성한 순천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꼬막잡이 뻘배가 하나 둘 여자만의 바다로 나가는 벌교까지도 다 순천의 땅이지요.
순천은 드물게 농촌과 어촌의 고향을 함께 그려보이는 곳입니다.
따지고 보면 도회지 사람이라 해도 열에 아홉 쯤은 한두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이런 시골마을에
‘추억의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구태여 남도 땅 순천을 찾아가라 권하지는 않겠습니다. 곧 추석명절입니다.
저마다 그리움의 보따리를 안고 귀향하는 길. 그 길에서 새삼 계절의 아름다움을,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일깨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지요.
유년시절의 아릿한 기억을 길어올릴 수 있는 고향 땅이 누구에게나
‘가장 훌륭한 여행지’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순천 = 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