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집으로 드는 어둑한 숲 그늘에 손바닥만한 가을볕이 비껴들었습니다. 꽃무릇이 그 볕을 받아 선혈처럼 낭자하게 붉은빛을 토해 놓습니다. 선물 상자에 매단 화려한 리본 같은 붉은 꽃잎, 거기다가 속눈썹처럼 길게 굽은 꽃술의 자태. 이즈음 절정을 향해가는 꽃무릇의 모습은 가슴이 두근두근해질 정도로 요염하답니다. 꽃무릇은 참 신기합니다. 꽃을 피우는 시기야 저마다 다르지만, 어떤 꽃이든 봄부터 가지와 잎을 내놓고 기다리다 계절을 따라 제 이름이 호명되면 하나 둘 꽃망울을 터뜨리는 법입니다. 그러나 꽃무릇은 다릅니다. 여름의 초입에 지난해 가을에 난 잎이 다 시들어 삭아버렸다가는 뜨거운 여름을 건너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다시 연두색 꽃대를 높이 올립니다. 그러고는 잎 하나 달지 않고 꽃대 끝에 붉은 꽃을 내어놓고 절정을 맞습니다. 그 꽃무릇을 찾아나선 길이었습니다. 이즈음 남도의 절집에는 경쟁이라도 하듯 꽃무릇을 군데군데 심어놓긴 했지만, 꽃무릇이 군락을 지어 피어난 장관을 목격하려면 전북 고창의 선운사나 전남 영광의 불갑사, 아니면 전남 함평의 용천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러고 보니 꽃무릇이 무리지어 피어나는 곳은 죄다 절집들입니다. 고요한 자태의 연꽃과는 달리 너무도 유혹적이어서 심지어 불온해 보이기까지 하는 꽃무릇이 유독 절집에 만개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절집을 찾은 아리따운 처녀에 반한 젊은 스님이 그만 짝사랑에 빠져 시름시름 앓다 피를 토하고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라거나, 출가한 스님을 그리던 처녀의 혼이 붉게 타오른 것이란 전설도 있지만 기실 절집 주변에 꽃무릇을 심은 이유는 건조합니다. 그 뿌리에 방부제 성분이 있어 절집을 단장하는 단청이나 탱화에 이겨 바르면 좀이 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라지요. 도솔천을 따라 피어나는 선운사의 꽃무릇은 올해 좀 늦게 당도할 모양이고, 불갑사나 용천사의 꽃무릇은 양지 바른 쪽부터 피어나 활활 불이 붙어 타들어가듯 옮겨붙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이번 주에 다녀오실 요량이라면 불갑사나 용천사를, 시간을 두고 찾아가겠다면 선운사를 찾아가면 되겠습니다. 불갑사와 용천사가 앉은 자리는 전남 영광과 함평으로 행정구역이 나눠져 있지만, 사실 능선으로 이어진 산의 이쪽과 저쪽 자락에 들어선 절집입니다. 먹을거리와 볼거리가 흔전만전한 영광 쪽에 머물면서 두 절집을 한목에 다녀오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니 더 길게 동선을 뽑아서 서해안고속도로로 선운사와 불갑사, 용천사를 다 잇는다면 더 좋겠지요. 영광·함평·고창=글·사진 박경일기자 parking@munhw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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