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렙 - 음악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난 꽃, 지라니 합창단

안국환 2009. 5. 26. 18:06

 

이달 초 나온 ‘내일은 맑음’(북스코프)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쓰레기더미에서 피어난 꽃, 지라니합창단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있었습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 근교 빈민촌 ‘고로고초’ 출신의 아이들이 합창단을 만들었다는 얘기였습니다. 국제 구호단체 소속 목사가 합창단을 만들었고, 한국인 지휘자가 아이들을 연습시켜 세계로 공연을 다닌다는 겁니다. 참, 별 일이 다 있다 싶었습니다. 첫 장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었습니다.

‘고로고초’는 스와힐리어로 쓰레기라는 뜻이랍니다. 마을을 둘러싼 쓰레기장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일년 내내 쓰레기를 태우는 역겨운 냄새와 검은 연기로 뒤덮인 이 마을엔 10만 명 넘는 주민들이 쓰레기를 줍거나 일용직으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 마을에 합창단이 탄생한 것은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의 임태종 목사가 2005년 이곳을 찾았다가 쓰레기장의 아이를 목격하면서부터입니다.

“아이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앉아 쓰레기를 뒤지다가 손에 잡히는 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던 듯, 작고 작은 몸집의 아이였다.” 임 목사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그는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꿈을 찾고, 노래를 듣는 이들에게 세상의 고통과 가난에 대해 책임감을 일깨울 합창단을 만들자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취지에 공감한 지휘자 김재창씨가 고르고초 마을을 찾았을 때, 기가 막혔던 모양입니다. 잠실 종합운동장보다 더 넓은 땅에 쓰레기들이 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독수리를 닮은 검은 새들이 그 위를 배회하면서 썩은 고기나 음식 쓰레기를 찾고 있었고, 소와 돼지들도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짐승들 사이에 사람이 섞여 쓰레기를 뒤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에서 흘러나온 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고요.

2006년 8월 합창단은 이런 마을에서 시작됐습니다. 임 목사는 지휘자 김재창씨와 함께 양철로 지은 초라한 교회 창고를 빌려 연습실을 만들었습니다. “이런 쓰레기 마을에서 돈벌이도 안 되는 일에 왜 아이들을 끌고 가느냐”는 학부모들의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지라니 합창단은 그 해 12월 케냐 국립극장에서 창단 공연을 가졌고, 2007년 6월에는 케냐 대통령 궁에서 정부 수립의 날 기념공연도 했습니다. 올 여름에는 미국 순회공연에 나서 30여 차례 무대에 섰습니다.

이 합창단이 지난 달 말 입국해서 내한공연을 갖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저녁 종로구민회관에 갔습니다. 창신동 시장을 지나 골목 안쪽으로 들어선 구민회관은 체육관을 겸한 공연장이었습니다. 조명이 꺼지고 합창단원들이 촛불을 들고 무대에 올라설 때까지 긴가 민가 했습니다. 공연 전문장도 아니고, 어린 아이들까지 많이 들어와서 분위기도 약간 어수선했거든요.

공연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깨끗하면서 맑은 아이들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여운이 남더군요. 뮤지컬 ‘라이온 킹’ 삽입곡으로 익숙한 아프리카 민요 ‘잠보’는 단박에 공연장을 아프리카 정글 속으로 바꿔놓았습니다. 아이들의 함성과 추임새, 몸짓은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것이더군요. 앙코르 곡으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부를 땐,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쓰레기장을 배회하며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도둑질까지 하던 아이들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바뀌었을까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쓰레기 마을에서 태어나서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아이들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열 다섯 살 브렌다는 그날 공연장에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처음엔 연습을 못나가게 막았다. 이젠 다르다. 내가 한국에 와있는 동안, 아빠가 동생들을 돌봐주신다.” 브렌다는 “엄마가 병을 앓다 돌아가셨다.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열 네 살 로런스는 작년에도 내한 공연단에 끼었습니다. 그 때 “내년에도 죽지 않고, 한국에 오면 좋겠다”고 말해 사람들을 애틋하게 만든 모양입니다. 그 아이는 이제 “파일럿이 되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대전 공연을 보러 온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박사가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답니다.

지라니 합창단은 30일 성남 아트센터, 그리고 다음달 3일 부천시민회관에서 마지막 공연을 갖습니다. 중간에 몇몇 교회에서도 공연을 갖고요. 이번 달, 유럽에서 온 유명 합창단 공연도 봤습니다만, 그것과는 또 다른 음악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더 각별하게 공연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자세한 공연 일정은 합창단 홈페이지(www.jirani.net)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