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감상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오페라 간주곡 모음집

안국환 2009. 11. 15.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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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Herbert von Karajan·1908∼1989)

 

 

‘20세기 음악의 제왕’ ‘음악의 테크노크라트’ ‘영상매체까지 지배한 마에스트로’ ‘20세기 최고의 상업주의 예술가’ ‘유럽의 음악장관’…. 바로 89년 7월16일 세상을 떠난 카라얀을 일컫는 말이다.

 

그는 타계하기 불과 3개월 전 34년간 몸담아 왔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종신지휘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1954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한 후 세르지우 첼리비다케가 베를린필 음악감독으로 추대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37세의 카라얀은 베를린필의 종신지휘자 겸 예술감독에 임명됐다.


하지만 끝내 단원들과의 불화로 예술감독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는 한마디로 독재형 지휘자였다. 단원 선발은 물론 독주자 선정권까지 장악했다. 단원들의 불만이 뒤늦게 표면화된 것은 카라얀이 그들에게 적어도 높은 수준의 소득을 안겨 주었기 때문이었다.

 

카라얀은 네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해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을 거쳐 빈 국립 음악원에서 지휘를 전공했다. 그의 카리스마적 성격은 토스카니니에게서 온 것 같다. 그의 성취욕 또한 대단했다. 1931년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탄호이저’를 듣기 위해 잘츠 부르크에서 바이로이트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무려 34년간 베를린필의 사령탑으로 있으면서 베토벤·브람스·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전곡을 CD는 물론 뮤직비디오로 남겼다.
그는 65년에 설립한 영화제작사 코스모텔을 통해 이미지 메이킹에도 성공했다. 촬영 각도나 자신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순간과 횟수까지 자신이 미리 결정했다. 이 회사는 각종 음악 다큐멘터리와 영화 제작에 손을 댔다.


‘오셀로’, ‘나비부인’, ‘라보엠’, ‘카르멘’, ‘장미의 기사’ 등을 영화화했으나 음반과는 달리 그가 만든 영화는 재정적 실패로 돌아갔다. 이들 필름은 독일 유니텔 소유로 넘 어갔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텔레몬디알사를 설립,레이저 디스크에 자신의 음악을 담았다.
그가 내놓은 음반은 SP·LP·CD·LD를 모두 합해 9백여종에 이른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만도 8백만장이 팔려 나갔다.


그리고 아직도 그의 음반은 베스트셀러 대열에서 이탈할 줄 모른다. 잘 생긴 용모와 매력으로 인해 그는 특히 여성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언론은 ‘카라얀 병’(Karajan-krank)이라고 이를 비꼬았다. 카라얀은 이들 ‘환자’를 치유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빈의 베스트 드레서로 꼽힐 만큼의상에 신경썼으며 해외연주 때는 이탈리아의 단골 이발사를 항상 대동했고 틈만 나면 이탈리아 스포츠카 페라리를 신나게 몰고 다녔다.


스위스 산장에서는 스키를 타고, 남프랑스 해안 별장에서는 수상스키를 즐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