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렙 - 여행

중국 태산을 답파하다

안국환 2009. 5. 26. 17:30
    진비무자명공재(秦碑無字名空在)
                         진의 무자비는 헛되이 이름만 남았고
   당각마애소자봉(唐刻磨崖蘇自封)
                        당의 마애석각은 저절로 이끼가 덮였다
   추격궁반상왕사(追客窮攀傷往事)
                       쫓겨난 나그네가 산에 올라 옛일에 마음 상하고
   불승비골수강풍(不勝痺骨受剛風)
                       야윈 몰골을 이기지 못한 채 거센 바람을 맞이한다

당대의 시인 이섭은 진 시황제가 비를 피하게 해준 나무에 9급작에 해당하는 ‘오대부’라는 작위를 하사한 데 대해 소나무에 대한 감탄과 인간의 비애를 동시에 나타냈다.


운목창창수만주(雲木蒼蒼數萬株)
              구름처럼 푸르고 푸른 나무가 많건만
차중언명역응무(此中言命亦應無)
              이 가운데 명령을 내려도 응하는 것이 없구나
인생부득여송수(人生不得如松樹)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이
각우진봉작대부(却遇秦封作大夫)
              대부에 봉해지는 소나무보다 못하구나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儒)는 ‘하일등대(夏日登岱)’에서 봉선대를 노래하고 있다. 방효유는 진한시대에 봉선의식을 행하던 봉선대를 바라보며, 하늘에 가장 가깝다고 여긴 태산 정상에서 벌어지던 성대한 의례를 상상하며 천지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그렸다.


진한구봉현벽낙(秦漢舊封懸碧落) 
              진한의 옛 봉선대가 푸른 하늘에 걸려 있고
건곤승개점부구(乾坤勝槪點浮   ) 
              천지 간 승경이 물거품처럼 생겼다 말았다 한다


우리나라 문인 중에서도 태산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서예가였던 양사언(楊士彦)이 시조를 썼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이것을 한시로 번역하면 ‘태산수고시역산(泰山雖高是亦山) 등등불이유하난(登登不已有何難) 세인불긍노신력(世人不肯勞身力) 지도산고불가반(只道山高不可攀)’이다.


양사언은 시조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꾸준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교훈을 태산에 오르는 것에 비유하여 시사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직접 실천하지도 않고 어렵다는 생각만으로 도중에 포기하거나 기피하려고 한다는 점을 꼬집고 있다. 그는 해서와 초서 등 글씨에도 능해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 서가로 알려져 있다.


▲ 하산 길에 있는 용담호에선 사계절 상관없이 사람들이 수영을 즐긴다.

갈수록 태산, 걱정도 태산 등 우리 지명 같아


태산은 이와 같이 많은 문인들이 작품으로 남겼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서 태산은 이미 굳게 자리잡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가 쓰는 일상 언어에서 비유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질 땐 ‘갈수록 태산이다’라 하고, 차근차근 모으는 것을 비유한 ‘티끌 모아 태산’, 걱정도 태산, 태산 같은 은혜, 입이 태산같이 무겁다, 태산을 알아보지 못 한다 등등 태산이 마치 우리의 한 지명같이 친숙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산에 얽힌 수많은 전설과 신화, 사연들에 대한 상념에 젖어 다시 태산 등산로로 발걸음을 옮긴다. 태산에 몇 번 오르내렸지만 여전히 ‘태산이 왜 그렇게 위대하게 됐을까’라는 의문은 여전했다. 그게 산일지 모른다는 생각과 ‘산은 역사다’라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태산에만 6일 새 세 번째 산행이다. 아직 한 코스 더 남았다. 일주일 동안 총 네 번 오르기로 했다. 중국 태산 트레킹 황동호 사장이 개척한 6개 등산로를 하산까지 포함해서 네 번 만에 끝내기로 했다. 한번 가면 십수 킬로미터를 걸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걷는 일 자체가 역사다. 과거 황제가 걸었던 길이 지금은 역사의 흔적으로 남아 후대에 문화유산으로 남아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 역사의 흔적을 따라 걷고 있다. 내 발길도 역사가 될까? 알 수는 없다. 이 등산로에 대해 기사를 쓴 사람은 없다. 그건 역사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자부심과 동시에 태산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황 사장이 개척한 B코스로 올라갔다.


B코스 들머리는 지난 호에 소개됐던 F코스와 같다. 오전 10시20분 산행 입구인 태악구에 도착했다. 초입의 밤나무는 여전하다.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그대로 자아내고 있다. 어제 올랐던 길이지만 오늘 또 새로운 맛이다. 등산로가 원래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산이 원래 그런 게 아닌가. 깊은 산일수록 보여주는 모습은 시시각각 다르다. 태산은 우리의 지리산 크기와 비슷하다. 어제 갔던 지리산이 오늘 똑같다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산은 항상 다르다. 가보고 느낀 사람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