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류연주회에 다녀와서
닝보(寧波)시는 중국의 23개의 省 중에서 가장 작은 쩌지앙(浙江)省에 있다. 쩌지앙성의 省都는 항쩌우(杭州)로 가장 크고 두번째로 큰 도시가 닝보시다. 닝보의 인구는 600만 또는 700만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통계자료를 볼 수 없었다. 주요 산업은 섬유업, IT산업이라 한다.
내가 이 도시를 처음 방문한 것은 2006년 겨울로 기억하고 있다. 그때 방문인원은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 단원65명과 지도자, 학부모 등 모두 80명 정도의 규모였는데 이곳에서 무려 8박9일의 일정을 소화했었다. 그 프로그램에는 음악 캠프를 비롯하여 닝보합주단과의 교류 연주회, 중국 가정에서의 홈스테이, 현장 체험 등 광범위한 내용을 담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무리하면서도 조금 무모한, 그리고 무척 힘들었던 일정으로 기억 된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운 과정이 있었기에 현제 우리의 음악교류 연주 행사는 순풍에 돛을 달고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2010년 7월 26일. 이날은 우리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 45명이 대구를 출발하여 닝보로 떠나는 날이었다. 닝보시 청소년궁학생예술단과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은 2년마다 교차 방문하여 교류연주회를 열기로 약속하였고 이번이 세번째 교류연주회가 되는 셈이다.
장마기간 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으나 30도를 웃도는 무더위는 아침부터 사람들의 기운을 쭉 빼놓았다. 집합장소는 대구 공항 1층 로비. 모이기로 약속한 10시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모였다.
대구에서 닝보까지 가려면 대구에서 출발하던 김해에서 출발하던, 아니면 인천에서 출발한다 해도 일단은 상하이를 경유해야 한다. 우리는 항공으로 대구에서 상하이까지 가서 거기서 버스로 닝보를 가기로 결정하고 일을 추진했다. 그런데 문제는 대구공항에서 상하이로 가는 비행기는 오직 중국의 동방항공기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하루에 딱 한번만 오고 간다. 상하이에서 오전 8시 50분에 출발한 동방항공기는 11시 30분 경에 대구 공항에 도착하여 승객을 내리게 하고 기내 청소와 약간의 휴식을 취한뒤 12시30분에 다시 상하이로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닝보를 찾는 지금은 성수기 중에서도 가장 피크에 해당되는 시기여서 항공료가 평시에 비하여 엄청나게 비쌀뿐만 아니라 45개의 비행기 좌석을 확보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각 여행사마다 그 회사의 고객을 위하여 한석이라도 더 좌석을 확보하기 위하여 좌석 쟁탈전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 좌석을 간신히 확보하고 우리를 초청해 준 닝보시 청소년궁의 담당자와 환영행사, 홈스테이, 리허설 시정, 합동연주 선곡 관계, 연주회 프로그램 작성 등 미세한 부분까지 상호 의견을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 합의 하였다.
그동안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은 7월 26일 닝보 방문에 앞서 7월 17일부터 팔공산 유스호스텔에서 3박4일의 음악캠프를 가졌고 21일에는 수성아트피아에서 29회 정기연주회를 성공리에 마쳤다. 그리고 24일 ,25일 이틀동안 닝보방문 연주단원(41명)을 모아 닝보에서 연주할 곡을 연습하는 등 빽빽한 스케줄을 소화하였다.
외국을 방문한다는 설레임과 연주를 통하여 대구의 위상을 알려야 한다는 긴장감이 아이들 얼굴에도 나타났다. 전같으면 이리뛰고 저리뛰던 녀석들도 오늘은 의자에 얌전히 앉아있다.
잘 다녀오라는 단원부모님들의 환송을 뒤로하며 드디어 우리 일행은 비행기 타랍에 올랐다. 상하이의 푸둥공항에 내려 마중나온 안내자를 따라 버스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두시간 후였다. 45인승 버스 한대로 이동하는 것이 안전사고 예방, 단원 관리 등 가장 효율적이라고 판단하여 닝보측과 방문 인원수를 모두 45명으로 제한한 것이다. 단원이 한 명이라도 더 가기 위해서는 가이드도 통역도 빼야 했다. 그리고 경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도 통역이나 안내자를 현지에서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4년 전에는 상하이에서 버스로 무려 6시간을 넘게 달려 닝보에 도착했었다. 그러나 항주만대교 덕택에 이번에는 3시간 30분 정도 걸려 여행은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항주만 대교. 중국 정부가 작년에 베이징 세계올림픽 대회를 앞두고 개통한 38km의 다리. 바다위로 벋어가는 세계 최장의 다리다. 노견을 제외한 왕복 6차선의 다리 난간에 칠해진 도색은 5km마다 다른 색깔로 변한다. 안개가 끼인 탓도 있겠지만 항주만대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찍은 항주만 대교)
(퍼온 자료)
작년에 인천대교를 달리며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사실에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을 생각하며 중국의 토건업 기술도 대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바다는 온통 황토흙 색깔이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 바다를 황해라 부른다.
3년전 닝보 청소년궁 아이들이 처음으로 대구에 왔을 때 연주를 마친 다음 날 감포바다로 안내한 적이 있다. 그 때 닝보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감포 바다에 다다르자 버스안에서 부터 터져나온 감탄과 탄성은 모래 사장에 내리자말자 일제히 바다물로 뛰어들며 온통 난리가 났다. 바다속 작은 돌맹이까지 훤히 들여다 보이는 감포 앞 바다는 사시사철 흙탕물이 출렁거리는 황해만 바라보던 닝보의 청소년들에게 충격과 경의로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 아이들이 왜 환성을 지르며 감탄했는지 지금의 이 황해를 보지 않았으면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으리라. 처음엔 나도 요즘 장마철이라 비가 많이 오고 또 얼머전 중국내륙지방에 수백미리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져 곳곳에 물난리가 났다는 보도를 기억하고 있는터라 장마로 인해 강물이 바다로 유입되어 이렇게 황토색깔로 흐려진 것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니 이 황해는 사시사철 황토색깔이라는 것이다.
약 3시간 반 정도 걸려 도착한 닝보청소년궁은 우리를 환영하는 현수막 , 환영간판등으로 꾸며져 있었고 우리를 초청해 준 손푸창 주임을 비롯한 청소년궁 단원들, 직원,학부모 등이 도열하여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닝보시 청소년궁
(환영 현판)
이 환영현판은 가로4M 세로 3M 정도의 크기로 제작되어 청소년궁 현관과 우리가 투숙한 닝보호텔 현관, 연주장소인 청소년궁 신극단 현관에 세워져 있었다. 이곳 사람들의 꽃에 대한 사랑과 빨간색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다. 환영식장은 말할 것도 없고 로비, 연주 장소, 식단의 식단위에도 빨간 꽃으로 꾸며져 있었다.
커다란 원형의 탁자에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먹음직한 음식들이 잔득 놓여져 있었다.
환영인사, 답례사 등 간단한 의식을 마치고 탁자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정담을 나누었다. 그리고 간단한 게임, 악기 연주, 노래 부르기 등 장기자랑으로 환영식을 마무리하고 믹박으로 들어갔다. 민박은 우리가 제안한 대로 여자 단원들은 2명씩 짝을 지어 배정되었지만, 짝이 없는 한 명이 혼자 배정을 받게되어 하는 수없이 다른 두명과 함께 한 가정에 3사람이 가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 인솔자들은 닝보의 손주임을 위시한 임직원들과 강가에 자리잡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리없이 흐르는 강물에 비치는 닝보의 야경이 볼만했다. 처음 왔을 때보다 닝보시는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그들의 경제적인 풍요로움을 엿볼수 있었다. 시가지도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고 여기저기 새로운 빌딩도 많이 눈에 띄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호텔 로비로 내려가니 벌써 운전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연주 시작 전까지 리허설이 계획되어 있는 날이다. 합동연주하는 악곡은 양도시의 단원들이 처음 맞추어 보는 관계로 오늘의 리허설은 매우 중요하다.
(연주 장소 : 닝보청소년신극단의 모습)
(중국에서는 연주하기 전에 반드시 해설자가 등장한다. 하늘색 옷을 입은 어린이가 오늘의 해설자이다.)
오늘 연주장소인 청소년궁신극단은 원래 강당이었던 것을 리모델링하여 공연장으로 꾸민 것인데 음악을 연주하는 장소로서는 매우 부적합한 곳이었다. 좌우면, 후면, 윗면 등에 설치되어 무대위에서 발생하는 소리를 객석으로 잘 전달해 주는 음향판도 없고, 조명도 음악회에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음악 효과를 극대화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시설이었다. 객석의 벽면도 음향학적인 효율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시설이었다. 객석은 500석 정도로 사운드 걱정은 하지않아도 될 것같다면서 우리는 웃었다.
드디어 리허설이 끝나고 단원들은 잠간의 휴식을 취하려 무대 뒤로 들어갔다. 청소년궁의 직원들이 나와 분주히 오가며 장내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귀빈석에는 탁자가 설치되고 그 위를 테이불 보를 씌운 다음 꽃으로 장식했다.그리고 참석을 약속한 VIP들의 명패가 순서대로 놓여졌는데 여기에서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이곳에 와서 지금까지 이념이 다른 국가에 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과 조금도 다르거나 어색하게 느껴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귀빈석이 따로 마련되어 장식되고 00 주석 000, 공산당 서기장 000 등의 명패가 놓여졌을 때 비로서 아하 이곳이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손푸창 주임과 나란히 귀빈석에 앉았다. 시간이 다가오자 관객들이 몰려 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중국의 달라진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난 2006년 7월에 첫번째 교류연주회를 위하여 이곳에 왔을 때 나는 극장안을 들어서자 마자 깜짝 놀란 일이 이었다. 그것은 객석이 한자리의 빈곳도 없이 관객들로 꽉 차 있었는데 모두 검정 양복에 흰 외아셔츠 넥타이 차림으로 정중하게 앉아 있었다. 음악회에는 정장차림이 예의라고는 하지만, 그 날 내 느낌으로는 동원된 관객이라는 인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옷차림도 제각각이고 관객도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어린이 심지어는 갖난 아이까지 대동하였다.
밝은 표정으로 자유롭고 여유있어 보이는 객석의 관객들. 필자의 좌측에 앉아있는 사람은 이번에
통역을 맡은 중국 닝보일보사의 손묘 기자. 손묘씨는 과거 2년동안 서울에 거주하면서 모대학의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였으며, 지난 2007년 닝보합주단이 대구에 왔을 때 역으로 중국측에
서 동행했던 사람이다.
표정도 밝고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하는 모습이 흡사 우리 대구학생문화센터에 몰려온 학생 관객 같았다. 어떻게 그 짧은 기간에 이렇게 바뀔수가 있단 말인가?
중국이 해마다 두자리 수의 경제 성장율로 경제발전 속도가 빨라 경제 규모로는 일본을 따라잡고 얼마후에는 미국까지 추월 할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예측도 있지만,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향상되기 위해서는 매우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그래서 중국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역시 후진국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것은 국민의식이라는 것이 그렇게 하루 아침에 변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상향되려면 우선 모든 국민들이 고르게 교육을 받아 기본적인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야하고 그위에 질서와 도덕적인 가치가 일반화 되어 사회생활에 있어서 약속과 질서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편리하고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의식수준이 향상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생활수준도 향상되어 꿈과 희망을 가지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어쨌던 지금 중국은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연주를 시작하기 앞서 손주임의 환영사, 필자의 답사, 양측 대표의 기념패 교환 등이 있었다.
무대위에서 환영사를 하는 손푸창 단장. 오른쪽 통역하는 사람은 한국인으로 닝보에서 사업하는
남편을 따라 왔다가 이곳에서 눌러 살고있는 재중 동포 송은주씨. 매우 학구적인 모습이 인상적
이었음
(답사하는 필자)
(기념패 교환. 김성은 악장이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을 대표하여 기념패를 전했다.)
이어서 오프닝 무대. 대구와 닝보의 어린 관현악단원들이 무대에 올라 닝보의 상임지휘자 포원개의 지휘로 피가로의 결혼을 연주했다. 무대가 좁아 중국 단원들은 모두 올라가지 못했지만, 연주효과는 좋았다. 빠른 템포는 이내 관객을 사로잡아 시끄럽던 장내를 조용하게 만들었다.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과 닝보학생예술관현악단의 합동 연주)
(닝보학생예술관현악단의 연주)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의 연주 : 지휘 전병완)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의 연주 : 지휘 전병완)
앵콜연주가 끝난 뒤 쏟아지는 박수에 답하기 위해 양측 지휘자가 나란히 무대에 나와 인사하고 있다.
좁은 홀안을 양 도시의 단원들이 연주하는 정제된 음향으로 가득 체웠을 때 관객들은 숨 죽이며 경의로운 눈빛으로 귀를 열고 있었다. 아마 오디오 기기가 아닌 라이브로 이런 음악을 듣는 기회가 흔하지 않는데서 오는 호기심과 경의로움이 아닌가 생각했다. 실제 무대위에서 지휘자의 지휘봉의 움직임이나 연주자들이 놀리는 팔의 움직임 같은 연주 장면은 듣는 음악을 훨씬 더 감동적으로 이끈다. 태풍처럼 휘몰아가는 지휘자의 마지막 팔의 움직임이 드디어 엔딩을 그렸을 때 지휘자, 연주자, 음향은 일순간 정지되자 뒤이어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박수 갈채, 끝이지 않는 박수 때문에 앵콜이 이어지자 홀 안은 다시 한번 음향으로 가득 체워진다.
몇 번 음악회에 와 봤지만 이곳의 음악회에서는 앵콜이 없어서 이상했었노라던 송은주씨는 처음으로 앵콜을 들을 수 있었다고 즐거워 했다.
닝보의 시민들은 이번 교류연주회를 하나의 커다란 시민적 행사로 승화시키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비록 관객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예절은 부족하고 세련되지 못해도 음악을 즐기고 음악을 통하여 여럿이 하나로 승화되는 모습에 감동을 받는 표정이었다. 연주회가 모두 끝나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서성대는 모습에서 사라져 가는 음악적 감흥을 아’쉬워하는 듯했다.
그날 저녁 단원들은 모두 민박집으로 돌아가고 우리측 지도자들과 닝보측 임원들은 가까운 음식점에서 차를 마시며 평가회 겸 뒤풀이를 했다. 닝보측 친구들은 오늘의 음악회가 대성공이라고 자평하며 흡족해 했다. 앞으로 이 행사를 계속 이어가자며 술잔을 높이 들었다.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은 창단된 햇수로는 금년이 17년이 된다. 정기연주회 29번째를 지난 7원21일에 가졌고, 닝보와의 교류연주회는 세번째다. 오케스트라 활동이 성장하는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세계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남미의 베네수엘라에서 일어나 지금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음악교육운동 「엘시스테마(El sistema)」가 그렇고 영국, 프랑스 , 핀란드 등 선진국에서도 국가적으로 음악에 대한 시책을 펴고 있다. 나는 1993년 대구소년소녀관현악단을 창단할 때부터 ‘합창이나 합주활동을 통해서 사회를 살아가는 덕목을 깨닫게 하자’ 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합창이나 합주의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너무나 흡사하다. 혼자가 아닌 여러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하는 공동체의 삶을 위해서는 질서, 약속, 준법정신 이 필수적이다. 이것을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서 깨닫게 하자는 것이다. 거기다가 외국과의 교류 활동을 통하여 미래 이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글로벌 에티켓, 국제시민으로서 갖추어야할 교양을 체험시키자는 것이 우리 관현악단의 이념이다.
2년 뒤 2012년, 우리는 닝보학생예술단을 대구에 초대할 것이다.
우리의 음악 교류행사는 계속될 것이고 이 행사를 통하여 우리의 소년소녀들을 꿈과 희망을 키워 나갈 것이다.
◀ 에필로그 ▶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홍구공원
홍구 공원안에 있는 매헌루(매헌은 윤봉길 의사의 호)
상하이에서 가장 붐빈다는 남경로에서
국제박람회 관계인지 남경로를 많은 외국인들이 보인다. 우리도 외국인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