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렙 - 음악

[주제와 변주] 정확하면서도 낭만적인 카리스마

안국환 2009. 8. 4. 20:43

ㆍ마렉 야노프스키의 브람스 교향곡

 

지휘자 마렉 야노프스키

  <베토벤 바이러스>의 주인공이었던 강마에의 실제 모델은 루마니아 태생의 지휘자 세르지우 첼리비다케(1912~1996)라는 ‘설’이 있다. 그러고 보니 “똥덩어리”로 대표되는 강마에의 독설은 첼리비다케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푸르트뱅글러가 세상을 떠난 후 카라얀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떠올랐던 첼리비다케는 실제로 ‘욕설’에 가까운 험담을 서슴지 않았던 괴팍한 성품의 지휘자였다. 카라얀이 보여준 ‘정치적 세련됨’에 견준다면, 첼리비다케는 길들일 수 없는 한 마리 야생마에 가까운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의 ‘독설 어록’에서 특히 유명한 것들은 다른 지휘자들에 대한 혹평이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그럴 듯하게 적확해서 무릎을 치게 만드는 측면도 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는 카라얀에 대해 “유능한 비즈니스맨이거나 귀가 안 들리는 인간”이라고 쏘아붙였고, 리카르도 무티에 대해서는 “재능은 있지만 무식한” 지휘자라며 폭언을 퍼부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에게도 “3주 동안 굶으면서 견딜 수는 있지만 3시간 동안 아바도의 연주를 들으면 심근경색이 생길 것”이라고 독설을 내뱉었다. 또 지휘자 카를 뵘을 “감자 포대”, 그보다 한 세대 앞의 거장이었던 토스카니니를 “음표 공장”이라고 평하며 예술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상의 ‘어록’은 안동림씨가 얼마 전 펴낸 <불멸의 지휘자>(웅진지식하우스)를 참조했음을 밝힌다.

이 안하무인의 카리스마. 알고 보면 첼리비다케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 욕을 얻어 먹은 토스카니니(1867~1957)도 사실은 한술 더 뜬 ‘폭군’이자 독설가였다. 그는 리허설 도중 성질을 부리며 지휘봉을 부러뜨렸고 단원들에게 악보를 던지기 일쑤였다. 악보뿐 아니라 지휘봉도 던졌다. 한 번은 단원 한 명이 지휘봉에 눈을 찔려 소송을 벌이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 그는 최고의 권력자 무솔리니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던 ‘반골’이었다. 그는 라 스칼라의 지휘자로 재임하던 15년간 파시스트의 당가(黨歌)였던 ‘조비네차’(Giovinezza, 청년)를 한 번도 연주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무솔리니와 그의 추종 세력들에게 늘 눈엣가시였다. 결국 1931년 테러를 당한 토스카니니는 이탈리아를 완전히 떠나 무솔리니가 죽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았다.

암스테르담 콘체르트헤보우를 50년간 지휘했던 빌렘 멩겔베르크(1871~1951)는 어땠는가. 바그너와 브루크너에게 평생을 전력 투구했던 한스 크나퍼츠부슈(1888~1965)는 어땠는가. 그들도 모두 카리스마형 지휘자의 표상이었다. 정치적 이념의 차이, 혹은 리허설을 오래 하거나 짧게 하는 등의 몇몇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 ‘호통 지휘’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들이었다.

올해 상반기에 인터뷰한 음악가들 중에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긴 이는 폴란드 출신의 지휘자 마렉 야노프스키(70·사진)였다. 그는 화합을 중시하는 민주주의형 지휘자들이 대세를 이룬 오늘날에도 여전히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지휘자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오페라극장의 도제 시스템 속에서 성장한 카리스마형 계보의 끄트머리쯤에 놓이는 지휘자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역시 대답에 거침이 없었다. “단원들에게 잘 보이려고 대화를 많이 나누는 건 쓸데없는 짓입니다. 지휘자는 모름지기 단원들을 압도하는 해석력을 갖춰야 합니다.”

야노프스키의 장기 가운데 하나는 브람스가 작곡한 네 곡의 교향곡일 터. 네덜란드 ‘펜타톤’(Pentatone) 레이블에서 2년 전부터 녹음해 발매해온 브람스 교향곡 1~4번 전곡이 얼마 전 국내에 수입됐다. 올해 초 그가 베를린방송 교향악단을 이끌고 내한해 선보였던 곡도 브람스 1번이었다. 펜타톤에서 내놓은 음반에서는 피츠버그 심포니의 지휘봉을 들었다. 해석은 내한연주 때와 대동소이. 음 하나 하나가 매우 정련됐고 악기들 사이의 균형감도 빼어나다. 그의 연주는 과거의 거장들처럼 감정을 다소 과잉시켜 두꺼운 음을 뽑아내지 않지만, 그렇다고 최근의 분석적 해석처럼 골격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연주도 아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그 중간쯤 되는 해석 아닐까. 정확하면서도 노래의 낭만이 살아 있는 연주. 다만 펜타톤의 엔지니어는 음의 모서리를 약간 다듬어 부드러운 맛을 추가한 듯하다. 덕분에 실제 연주에 비해 강렬한 맛은 다소 줄었다. 그래도 이 음반이 브람스 애호가들의 컬렉션에 추가되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내한 무대에서 시종일관 무뚝뚝한 표정으로 브람스를 지휘하던 야노프스키. 연주를 다 마친 후, 비로소 딱 한 번 미소짓던 모습이 떠오른다.

<문학수 선임기자>